교통 조선 후기 용산의 포구 풍경
  • 고동환 /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명예교수
17세기 후반 용산방(龍山坊)의 설치와 유민(流民) 집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한 17세기 조선사회는 전 지구적으로 나타났던 소빙기(小氷期) 기후로 인하여 흉년과 전염병이 잇따랐고, 그 여파로 농민들의 유리가 심화되었다. 유민들은 진휼이 행해지는 곳을 찾아 계속 이동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지방에서는 진휼 대상을 자기 고을 사람에게만 한정시킨 반면, 서울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진휼하였다. 그러므로 전국의 유민들이 서울로 많이 몰렸으며, 이때 몰려든 유민들은 대부분 성 밖, 특히 한강변에 집단 거주하였다.

이와 같은 유민들의 한강변 집주로 인해서 한성부의 행정 편제도 변동하였다. 조선왕조 초기 한양도성 안은 방(坊)으로 도성 밖은 성저십리(城底十里)로 편성하였다. 다만 인구가 많은 서대문 밖의 반석방과 반송방, 동대문 밖의 숭신방과 인창방은 방제로 편성하였다. 면리제로 편성되었던 용산지역은 17세기 후반 유민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용산방이 설치되어 방제로 편성되었다.

조선 후기 한성부의 행정 편제는 5부‐방‐계의 구조를 가졌는데, 1789년(정조 13) 『호구총수』의 기록에 의하면 용산방의 계는 청파계, 옹리계, 토정리계, 도화동계, 공덕리계, 마포계, 신촌리계, 만리창계 등을 포함하여 모두 20계이며, 호구는 4,617호, 인구는 14,915명이었다. 계의 명칭에서 보듯이 조선 후기 용산방의 영역은 오늘날 마포지역을 포괄하였다. 1789년 용산방의 인구는 한성부 47개 방중에 가장 많았다. 그리고 1735년(영조 11) 용산방 옹리계의 호는 1천여 호에 달하였다. 1789년 1천 호를 넘는 도성 안의 방이 5개에 불과했는데, 옹리계에 1천 여호가 거주했다는 점은 용산방의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고의 집중과 빈민들의 하역운수업

용산에는 조세곡을 보관하는 각종 창고들이 밀집했기 때문에 한강 참운(站運)과 서해 조운을 통해 운송된 조세곡이 집중 하역되었다. 전세(田稅)는 서강의 광흥창에 하역되었지만, 대동미나 군포나 결작(結作) 등은 대부분 용산에 하역되었다. 용산에는 30여 만석의 곡물을 저장한 군자감 창고가 있어서 국방에 필요한 물자는 물론 각 아문의 각종 비용과 종사자들의 급료 등을 보관하였다. 또한 1597년(선조 29)에는 훈련도감 군병들의 급료로 매달 4천여 석의 쌀과 콩을 지급하는 창고인 별영(別營)이, 1640년(인조 18)에는 호조의 별무가(別貿價) 곡물 2만 2천여 석을 보관하는 별고(別庫)가, 1657년(효종 8)에는 삼남의 대동미를 보관하는 강창고(江倉庫)이 각각 용산에 설치되었다. 

이처럼 창고가 많았으므로 용산 주민들은 하역 운수업체인 운부계(運負契), 마계(馬契), 모민계(募民契), 거부(車夫), 마부색장(馬夫色掌) 등에 소속되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운부계는 배에 실린 물건을 지게로 지어 나르는 지게꾼들의 조직이며, 마계는 말등에 물건을 싣고 운반하는 조직이고, 모민계는 포구에서 하역 운수에 부수되는 각종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이며, 거부는 수레로 물자를 운송하는 사람들이며, 마부색장은 말을 가지고 물건이나 사람을 태워주는 일을 했다.

용산지역의 하역 운수 노동자들은 “하역 운수의 품삯으로 1태(駄) 당 2전 씩 받아, 아침과 저녁은 마포 시장에서 사먹는”(江民資生之道 專靠於馬背 而一駄之雇價 不過二錢 朝夕買食於麻浦之市) 초기 부두 노동자의 성격을 갖는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사흘 먹을 것을 잃어버리는(江郊殘民一日失業 必失三日之食)” 품팔이 노동자였다. 이들 빈잔민들은 이밖에도 급가모립(給價募立)하여 운영되던 호위군관, 훈련도감 군병 등의 군병으로도 일했다. 이처럼 용산지역에는 별다른 재산 없이 품을 팔아 살아가는 비숙련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이들은 겨울철 한강 결빙으로 배가 통행하지 못할 때는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까지 운반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상업중심지와 유흥가로서의 용산

용산에서는 선박으로 운송된 미곡, 목재, 어물 및 소금이 주로 거래되었는데 용산에는 염전(鹽廛), 시목전(柴木廛), 옹리합회전(瓮里蛤灰廛) 등의 시전이 있었고, 마포에는 용산보다는 훨씬 많은 시전이 있었다. 용산과 마포지역에 대거 시전이 설치되어 도성 내부를 능가하는 상업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자 용산이나 마포로 통하는 도로가 번화가로 변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왕성 5부 안의 애오개 (阿峴)는 서강으로 가는 길이고, 약점현(藥峴)은 용산으로 가는 길로서 곡물이 폭주하고 수레가 부딪치고 사람이 어깨를 부딪치는 곳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용산과 마포지역에는 술집이 6백여 곳이 넘었고, 이곳에서 술을 빚는데 소비되는 쌀만 1년에 수만 석에 달할 정도였다. 그리고 술을 담은 항아리가 1천여 개에 달하는 대형 술집도 여러 곳이 있었다. 조선 후기 용산지역은 상업중심지만이 아니라 술의 제조·판매업의 중심지로서 유흥가로서 번성하였던 것이다.


경강부민(京江富民)과 소송을 즐겨 제기하는 사람들

한편 원래부터 한강가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한강을 배경을 어업을 영위하거나 지방에서 올라온 뱃사람들의 화물을 보관하고, 이들에 게 숙식을 제공하고, 나아가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는 여객주인(객주)으로 살아갔다. 객주들은 시장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온 선상들을 종속시켜 상업이윤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경강부민(京江富民)으로 불렸다. 경강부민들은 우월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강 주변의 마을들을 지배했다. 이들은 빈잔민들을 마음대로 침탈하였고,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온 한성부의 장교들을 구타하여 부상을 입힐 정도였다. 경강부민들의 위세는 “읍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감영의 위세도 통하지 않을 만큼” 막강하였다.

19세기에 이르면 서울은 신분적 위세보다는 경제력이 위력을 발휘하는 상업도시로 변모되고 있었다. 19세기 전반 14년간 정승 을 역임했던 남공철(南公徹)은 “서울은 돈으로 생업을 삼으며, 팔도는 곡식으로 생업을 삼는다(生民之業 京師以錢 八路以穀)”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842년(헌종 8) 어사 마패를 위조했다가 포도청에 끌려온 죄수도 “서울은 시골과 달라 돈이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는 곳(京中異於鄕中 有錢則無事不成)”이라 하여 화폐가 모든 경제활동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실감 있게 얘기하고 있다.

이처럼 시장경제가 성장하게 되자 용산지역을 비롯한 한강변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송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한강변 주민들을 ‘소송을 즐겨 제기하는 사람(好訟之民)’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성부 서부(西部)에 소송을 제기하여 자기 뜻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한성부나 형조로 월소(越訴)하였고, 이 단계에서도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상언과 격쟁의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 한강 주변 백성들의 상언과 격쟁은 대부분은 상업 이윤을 둘러싼 것이었다. 용산지역 주민들의 쟁송이 많은 것은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경제적 이윤을 둘러싼 갈등이 폭주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경강부임진도」, 『동국여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 지도는 한강과 임진강의 수로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로서 수로를 통해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도이다. 18세기 중엽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경강상인들은 춘천의 우두촌, 충주의 가흥창, 임진강의 연천까지 모두 외상으로 거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지도에서 포괄하는 시장권과 일치하고 있다.


 
「도성도」, 『동국여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 지도는 도성 안에 궁궐과 관가가 대폭 생략되고 민간 가옥과 촌락이 강조되고 있으며, 한강변 취락인 두모포, 한강진, 둔지촌, 서빙고, 동작, 노량, 용산, 동막, 마포, 광흥창 등 한강 주변에 발달한 취락을 잘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