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일본군의 재생산을 기원하던 안산신사를 아십니까?
  • 이신철 / 히스토리D
일본군 장교 부인들의 안산을 기원하던 안산신사

“안산신사에 참배하면 순산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그래서 우리 육군 만세 만만세”

식민지 시기 일본인들이 발간한 조선신문(朝鮮新聞) 1927년 11월 13일 자에 실린 내용이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용산기지의 가장 높은 곳 둔지산에는 안산신사(安山神社)라는 일본의 종교시설이 있었다. 그 규모는 초라하고 작아 보였지만, 그곳은 그야말로 의미심장한 곳이었다.

일본군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했고, 일본 여인들은 아들 순산을 기원했다. 경성중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일본군과 함께 참배하기도 했다. 그 같은 모습은 안산신사를 건립했던 마츠모토 대위가 사이토 총독에게 선물한 사진에 등장한다. 마츠모토는 왜 굳이 중학생들의 참배 모습을 담은 사진을 총독에게 선물했을까? 그것은 그가 신사를 건립해 일본군으로 성장할 수 있는 남자아이들의 출산을 기원하는 데 이용했던 이유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을 지배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대륙을 침략하겠다는 의지와 충성의 맹세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1〉 용산 육군신사 전경, 1920년 11월 28일, 사이토마코토기념관 소장(斎藤實記念館所蔵)
경성중학교생들의 안산신사(육군신사) 참배 사진으로, 마츠모토 대위가 사이토 총독에게 준 것이다.

안산신사의 건립 경위는 당시의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미신에 기반한 것으로 용산으로 파견되는 군인들이 거치는 주요 도시와 지명이 불길하기 때문에 그것을 잠재울 종교적 위안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현해탄을 넘어 도착한 곳이 부산인데, 지명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후잔 또는 후산이 되는데, 공교롭게도 불산(不産)의 발음도 후산인 것이 불길하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조선에 부임해서 최초로 상륙한 곳이 불산不産 (釜山), 사는 곳이 유산流産(龍山), 조석으로 보이는 산이 난산難産(南山)이라니, 아무리 원기 왕성한 장교라도 신경 쓰이는데, 부인 동반은 꺼리게 된다” 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인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고, 생각해 낸 것이 안산(安産)신사였다. 다른 지명과 마찬가지로 안산(安山)이라는 지명을 일본식 발음대로 안잔으로 읽고, 같은 발음의 안산(安産)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안산신사 건설을 위해 파괴된 조선 왕실의 제의 공간

그런데 이처럼 일본 제국의 무궁함과 조선 지배를 유지하는 무력의 재생산을 기원하던 이곳은 애당초 어떤 곳이었을까?

안산신사가 있는 둔지산 정상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산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조선 왕실은 남산을 신성시해 국사당(國師堂, 현 남산 팔각정 자리)을 설치하고, 민간의 제의를 금지하고 왕실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공간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칭하고, 세조는 국사당을 목멱사(木覓祠)라고 칭했다. 조선 왕실은 남산에서 둔지산까지 이르는 공간에 다양한 제의 공간을 마련했다. 두 산의 가운데 어느 지점에 남단(南壇)을 두고, 5방토룡제(五方土龍祭)를 지냈던 곳이다. 이는 기우제(祈雨祭)를 열한 번 지내도 비가 오지 아니할 때 열두 번째로 지내는 기우제였다. 그리고 둔지산에는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을 설치했다. 이들 공간은 사람의 수명을 맡아보던 별인 노인성, 농업신인 영성 등 모두 하늘과 자연을 향해 제사 지내던 곳들이다. 

그리고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의 식민화를 본격화하기 위해 용산에 일본군 기지를 설치하면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일본군 기지가 건설되면서 남단은 그 운명을 다하였고, 지금은 흔적은 고사하고 위치조차 비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둔지산의 제의 공간들도 모두 파괴되었고, 그 제일 높은 자리에 저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안산신사를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겨버렸다. 조선신궁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용산기지가 온전히 한국의 품으로 돌아오고, 둔지산에 대한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혹 남단이나 다른 제의 공간들의 어떤 흔적들이라도 찾을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희망이 크지 않다. 〈사진 1〉에 보이듯이 신사 주변은 말끔히 정리되어 나무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안산신사를 건설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치워버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제국주의자들이 자신이 점령한 지역의 종교시설을 자신들의 종교시설로 활용하거나, 그 위에 자신들의 종교시설을 덧지어 활용하는 것과도 사뭇 다른 모습이다.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던 안산신사

일본인 여성들의 순산을 기원하던 안산신사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안산신사는 위수지진수안산대신궁(衛戍地鎭守安山大神宮), 안산대신궁, 진수안산신사(鎭守安山神社), 안산신사당(安山神社堂), 안산신사, 육군신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병영 내에 위치하고 있었고, 주로 육군이 활용했던 곳이기에 육군신사로 불리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호칭은 바로 신궁이다. 보통 일본의 신사에서 천황이나 그 조상신을 모시는 경우 신궁이라고 칭하지만, 정식으로 신궁 명칭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유래가 있어야 하고, 신사 본청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마츠모토가 처음 안산신사를 건립할 때, 아직 조선신궁이 없었고 시조신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오카미)과 명치(메이지)천황을 모셨기 때문에 신궁이라 칭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산신사는 조선신궁을 건축하고 남은 나무를 활용해 1926년 다시 지어졌다. 신사는 그해 11월 25일 준공하였고, 28일에 준공식을 겸하여 임시대제를 거행하였다. 행사에는 모리오카(森岡) 조선군 사령관, 히키다(引田) 20사단장, 기타 육군의 고급무관이 참석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보다 그 위상이 더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신사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는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 2〉신문에 실린 신축 후 안산신사의 모습과 신사 건립의 유래 『조선신문』, 1927.11.13.

이처럼 안산신사는 천황과 일본에 충성을 다짐하는 장소였다. 그 관리는 해행사라는 조직이 담당했다. 해행사는 일본군 육군 장교 제대자들의 친목 단체이다. 당시 해행사는 용산기지 내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단체는 군대와 함께 하면서, 장교들의 복리후생에 기여하고 각종 행사를 진행해 군과 그 가족을 위무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안산신사는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일본군의 종교시설을 그 본질적인 성격으로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후예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여성들을 안심시키는 종교 공간으로 활용했다.

이제 안산신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엔 미군의 물탱크가 설치되 었던 흔적만 남았다. 그곳에 무엇을 세울지, 어떤 공간으로 기억할지는 순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